▲ KBG84는 일본 코하마섬 뿐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최고령 아이돌 그룹입니다 ⓒThe Guardian
아이돌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 어떤 것들이 있으신가요?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소년, 소녀들을 떠올리실 것 같은데요. 20대 중반만 넘어가도 아이돌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이죠. 그런데 이웃 나라 일본에 나이가 조금 많은 아이돌이 있습니다.
할머니들로 이뤄진 걸그룹?
이 아이돌의 평균연령은 84세, 그룹 내 센터를 맡은 멤버의 나이는 무려 95세입니다. 일본 최장수 아이돌 ‘KBG84’은 최근 국내 한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KBG84’라는 이름은 일본 오키나와현 코하마 섬의 ‘K’, 할머니를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인 ‘바짱’의 ‘B’, 그룹을 뜻하는 ‘G’, 여기에 멤버들의 평균나이 ‘84’를 붙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입단 자격은 80세 이상이며 70대라면 연습생 신분을 거쳐야 합니다. 오키나와 민요부터 최신 댄스곡까지 섭렵한 이 그룹은 2011년부터 도쿄에 진출해 매년 콘서트를 여는 등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공연 때 배포하는 홍보물에는 “할머니들의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하네요.
‘KBG84’는 초고령사회 일본의 문화 트렌드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일본은 2005년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 이상)에 진입한 세계 최고 장수 국가입니다. 작년에 90세 넘는 고령 인구가 200만명을 넘어섰죠. 우리에게 일본은 인구학적 관점에서 ‘살아있는 참고서’와 같은 존재입니다.
노령화를 ‘나쁘게’ 보기보다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는 이례적으로 노년 배우들을 주연으로 내세워 ‘황혼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뤄 많은 사랑은 받았습니다. ⓒtvN 공식 홈페이지
다른 사회 현상과 마찬가지로 노인 인구의 급증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물론 치매, 노노간병, 고독사 등 초고령 사회의 어두운 그늘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령화 현상을 사회경제적으로 무조건 나쁘거나 위험 요인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들은 과거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정하고 건강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일하는 사람이 늘고 젊은 층의 인구가 줄기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기도 하죠.
일본에서는 건강한 몸과 충분한 자산을 갖고 적극적으로 소비하면서 자신의 취미에 몰두하는 노인층을 ‘액티브 시니어’라고 합니다. 이들은 소비의 견인차 구실을 합니다. 전체 개인 소비의 절반 정도를 60세 이상 노년층이 주도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시간, 체력, 돈 모두를 갖춘 액티브 시니어의 등장
▲ 일본의 ‘액티브 시니어’는 충분한 재력과 체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소비와 취미 활동에 몰두합니다
이들은 해외 유학과 어학연수를 꿈꾸고, 그 나라 문화를 직접 체험하면서 유적지를 관광하는 진정한 ‘세컨드 라이프’를 즐기기도 합니다. 짧게는 3주에서 3개월 정도 현지에서 생활하면서 외국어도 배우고 현지문화를 체험하는 프로그램들이 인기라고 합니다.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생각해왔던 노인층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모습입니다.
이탈리아어를 배우면서 유서 깊은 와이너리 견학을 하고, 영국에서는 가드닝을 체험하면서 영어를 배우고 하와이에서는 서핑과 요가를 배웁니다. ‘젊은 노인’들을 위한 ‘워킹 투어(걷기 여행)’ 상품도 많습니다. 전문 가이드와 함께 명승지를 둘러보면서 걷는 프로그램입니다.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체험’과 ‘힐링’을 강조하는 투어 상품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건강하고 능력있는 노인들은 물건을 사는 것보다는 경험과 가치, 체험을 원합니다. 국내에도 ‘취향을 설계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진 츠타야 서점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커피와 음식을 먹고, 음악, 여행, 요리 등 자신의 관심 분야를 상담받을 수 있는 독특한 체험 공간입니다. 대형 백화점이 철수한 건물에 *츠타야 서점과 같은 복합 체험공간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서점의 미래라고 불리는 일본의 복합문화공간
고령자의 증가, 새로운 시장을 만들다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들의 여가 생활을 돕는 서비스도 다양합니다. 우선 병간호가 필요하거나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고령자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트래블 헬퍼(travel helper)’가 등장했습니다. 이동과 식사, 목욕, 응급 상황 대비 등은 물론 숙박시설을 예약하고 여행 코스를 짜는 등 병간호와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도맡아 합니다. 여행뿐 아니라 가벼운 외출부터 친구와의 모임, 가족 행사 참석 등도 도와주는 ‘외출 지원 전문가’도 있습니다.
일본은 ‘편의점 강국’입니다. 혹시 일본 편의점에는 있지만 한국 편의점에는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성인용 기저귀와 간병 상담사, 그리고 조제약입니다.
이처럼 일본 편의점에는 ‘고령자 맞춤형’ 상품이 갖춰지어 있습니다. 점포 안에 고령자 병간호센터를 두는 매장도 늘었다고 합니다. 매장의 ‘노노접객’도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노인 판매원들은 노인 고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금방 알아차리고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일본의 장례 문화도 갈수록 변화하고 있습니다. 가족이 없거나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새로운 장례 방식을 적극적으로 택하면서 장례 문화도 함께 진화하고 있는데요.
▲ 일본에서 인기인 ‘하이테크 납골당’은 단말기에 ID카드를 인식시키면 참배 장소를 안내해줍니다. ⓒ히카리 료엔[ひかり陵苑]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이테크 납골당’입니다. 도쿄 도심 속 5층 건물로 된 탑상형 ‘첨단 묘’인 하이테크 납골당은 마치 주차타워에 번호를 입력해 차를 찾는 것처럼 ID 카드를 찍은 후 30초에서 1분 정도면 참배 장소로 납골함이 도착합니다. 참배하는 동안 화면에서는 고인의 생전 모습과 음성이 제공됩니다. 협소한 장소에 대량의 짐을 보관하고 분류하는 자동창고 기술이 응용되었다고 합니다.
또 고인의 유골을 넣은 캡슐을 인공위성에 실어 우주에 보내는 ‘우주장(宇宙葬)’도 화제를 모았습니다. 우주로 간 유골 캡슐은 지구 주위를 수년 간 돌다 대기권에 돌입하면서 유성처럼 타 없어진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그동안 휴대폰 앱으로 캡슐이 실린 위성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하네요. 고령자나 노약자가 차를 탄 채 조문을 할 수 있는 ‘드라이브 스루(drive-thru)’ 장례식장도 초고령 일본 사회의 이색적인 풍경을 대표합니다.
노인 대국 일본의 트렌드 변화는 우리에게 분명 힌트가 될 것입니다. 그들도 문제를 깊게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해 적응해왔을 것이기 때문이죠. 한국은 일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닥칠 사회 문제를 미리 고민하되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 경제적 활로를 찾는 노력도 필요하겠습니다.
참고문헌. 김웅철 저 ‘초고령화사회 일본에서 길을 찾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