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사람과의 거리는 불과 10cm. 쌔근거리는 숨결까지 느껴집니다. 맞닿은 얼굴에 민망한 시선은 허공을 헤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애인하고도 이렇게 진하게 붙어 있진 않을 것 같은데요.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색하고 민망한 풍경이 펼쳐지는 곳, 이곳은 지하철 9호선입니다.
9호선은 대표적인 지옥철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열차에 몸을 싣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이죠. 자리를 얻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떤 이들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모험도 불사합니다.
과정은 부담되지만, 효과는 확실한 모험. 이번 지하철 리포트에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돌아가라, 그러면 생길 것이다
A씨의 사례부터 들어봅시다. A씨는 올림픽공원역에서 여의도역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입니다. 요즘 그는 평소보다 10분 일찍 집을 나섭니다. 중앙보훈병원역에서 개화역으로 향하는 9호선. 이 고단한 노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올림픽공원역에서 승차한 그는 개화행이 아닌 반대 방향 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중앙보훈병원역에서 하차한 A씨는 다시 개화행 열차로 이동합니다. 그 사이 10분 남짓의 시간이 흐릅니다. A씨는 이제 열차 안을 바라봅니다. 빈자리가 넉넉하게 보입니다. ‘어디에 앉아서 갈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평소 선호하는 자리로 이동해 앉습니다. 흡족해하는 A씨는 이내 스르르 잠에 빠집니다.
사람 많은 9호선에서 앉아 가려면 A씨 같은 전략이 필요한데요. 그가 선택한 전략은 ‘돌아가기’입니다. 혼잡도가 덜한 ‘노선 출발 지점’으로 돌아가,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죠. 물론 평소보다 바삐 움직여야 한다는 부담이 따릅니다. 하지만 이보다 확실한 자리 확보 방법이 또 없습니다.
장거리 출근자의 선택
‘그런 방법을 누가 써?’ 싶겠지만, 나름대로 증명된 전략입니다. SKT 고객 데이터를 살펴보면, 적지 않은 승객이 ‘돌아가기’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올림픽공원역에서 중앙보훈병원역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개화행 열차로 갈아탄 승객 비율을 보겠습니다. 7시부터 10분 단위로 측정한 결과입니다.
7시부터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승객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7시 40분에는 3.7%까지 올라갑니다. 7시 50분부터는 점자 감소하고, 8시 이후에는 1% 미만으로 뚝 떨어집니다. 3.7%만 떼어놓고 보면 적은 비율입니다. 하지만 10분 단위 측정인 것을 고려한다면 의미 있는 비율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이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중앙보훈병원역으로 역행했던 승객 대부분은 강서 지역에서 하차했습니다. 1위는 여의도역이 차지했습니다. 강서의 끝자락인 마곡나루역도 2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상위 하차역만 보아도 대부분 장거리 승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강동에서 강서까지… 앉아 가기 위해 행선지와 반대 방향으로 타는 승객들. 이들의 이동 거리를 생각한다면,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준비할 것은 오직 시간
‘돌아가기’ 전략은 주로 열차 출발 지점 인근에 거주한 사람들에게 유효합니다. 중앙보훈병원역-개화역 구간이면 올림픽공원역~둔촌오륜역 인근 거주자가 해당됩니다.
준비할 거라곤 오직 ‘시간’입니다. 올림픽공원역에서 중앙보훈병원역으로 이동하는 데 5분, 열차를 갈아타는 데 5분, 총 10분만 투자하면 됩니다. 넉넉잡아 20분을 투자하면 시장통 같은 통로를 피해 앉아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밥 한술 뜰 여유조차 없는 아침 시간에는 더욱더 그렇죠. 하지만 20분의 투자로 하루 컨디션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돌아가는 승객은 비단 9호선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란에서 암사로 향하는 8호선에서도 종종 보입니다. 이 구간의 경우 출발점(모란역)에서 3정거장 뒤인 단대오거리역부터 승객이 몰리기 시작합니다. 때문에 모란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암사행 열차에 오르는 승객이 있습니다.
데이터가 보여주듯 적지 않은 승객이 앉기 위해 돌아가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데요. 만원 열차 타느라 출근길이 고단한 당신, 내일 아침에는 조금 여유를 부려 모험을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