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계에서도 AI를 통한 실험적인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다. 보수적이라 평가받는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AI 로봇 지휘자가 등장해, 무대 위에서 인간 연주자와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로봇이 인간에게서 지휘봉을 빼앗아가는 미래가 올 수 있을까? 진솔 지휘자에게 AI 로봇 지휘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물었다.
지휘자, 단원들과의 소통과 교감이 중요… ‘진짜’는 로봇 지휘자가 모방하기 어려워
지휘자 진솔은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독일 만하임 국립음악대학교에서 지휘를 전공한 정통파 음악가다. 비상설 앙상블 ‘아르티제’를 창단해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말러리언 프로젝트’로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나아가 국내 최초 게임 음악 전문 공연 플랫폼 ‘플래직(FLASIC)’의 대표이자 음악감독으로 문화 예술 분야에서 ‘고전 음악과 현대 음악을 넘나드는 젊은 혁신가’로 인정받고 있다.
Q.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지휘자는 음악을 해석하고 전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며, 연주자들이 한 목소리로 연주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오직 지휘자의 말에 따르고요.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같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전혀 다른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휘자는 음악에 대한 역량과 지식은 물론, 인성까지도 갖춰야 하죠. 단원들을 심리적 ∙ 정치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 리더십도 필요합니다. 지휘자가 음악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 문화예술계의 AI 도입 사례 – AI 도슨트 ‘큐아이’
지난 2008년 ‘아시모’와 2017년 ‘유미’ 등, 로봇 지휘자를 무대 위에 올리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2023년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에버6’가 무대에 올랐다. 에버6는 기존 로봇에 비해 동작의 역동성은 부족하지만, 어깨와 팔, 손의 움직임이 유연하고 섬세하다는 장점을 발휘해 지휘 공연을 마쳤다. 당시 공동 지휘를 맡은 최수열 지휘자는 시연 이후 “지휘자나 연주자가 보기에도 지휘 동작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발전된 기술이 놀랍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Q. AI 로봇 지휘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로봇 지휘자를 무대에 올려 진행한 공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휘는 템포를 맞추는 것보다 단원들과의 호흡이 중요한데, 로봇 지휘자는 인간적인 소통과 교감 없이 미리 입력해 둔 동작을 본 연주에서 재현하는 데 그쳤습니다. 흥미로운 시도였지만, 기술이 어디까지 진화했는지를 확인하는 하나의 실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봇이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지휘자는 어떤 표정과 대화로 단원들을 설득해야 하는지 늘 고민해요. 매 연습, 리허설, 공연마다 단원들의 반응과 상황을 살피며 최적의 효율과 최고의 연주를 이끌어내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로봇 지휘자가 해낼 수 있느냐고 하면, 아직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로봇이 인간에게 편리한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는 방향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Q. 지휘자로서 AI 로봇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얼굴이자 정신적인 리더입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만이 이룰 수 있는 신뢰가 중요하죠. 그러다 보니 지휘자의 종교, 나이, 평판을 비롯해 머리 염색의 빈도까지도 지휘자 선발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오케스트라 단원이라는 각각의 인격체를 아우르는 리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로봇이 이들을 통솔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아닌 로봇의 의견을 존중하고 통솔하는 대로 따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의 성향을 학습한 모델이라 해도 말이죠.
Q. 그렇다면 로봇 지휘자가 흉내낼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말러 교향곡 7번은 난도가 높기도 하고, 100여 명의 단원들이 어린 학생들이라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력을 높이는 지휘가 필요했습니다. 원래는 10~15초 정도 쉬고 다시 2악장을 시작해야 하는데,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20~30초 정도 지난 뒤에야 연주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공연이 끝난 뒤에 ‘왜 그렇게 오래 쉬었냐’, ‘쓰러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요. 사실 관객들은 지휘자가 혼신을 다한 공연과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인간적인 스토리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진짜’의 모습은 로봇 지휘자가 모방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Q. 앞으로 AI가 우리 생활에 긍정적으로 활용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AI는 원하는 결과값을 도출하는 주문 제작형이고, 인간이 주문 제작을 해도 일말의 자아가 반영될 수밖에 없잖아요. 이러한 특성 때문에 휴머니즘이 필요한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으로 나뉘어 AI 활용도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슈마허’, ‘야마하’ 등의 피아노 회사에서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와 직접 계약을 맺고 자동으로 그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피아노를 개발하고 있는데요. 이런 움직임은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 피아노 산업을 발전시키는 대안이자, 피아니스트의 정당한 소득원이 되어주는 건강한 시도라고 봅니다.
음악은 기술 발전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혁명가들이 있어 발전해왔습니다. 많은 악기들이 개량을 거쳐 다양한 음을 낼 수 있게 된 것 처럼요. AI 기술도 마찬가지로 미래를 이끄는 혁명가들에 의해 빠르게 개발되겠죠. 이처럼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힘쓰고 있기에, 진정한 예술인은 결국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솔 지휘자는 “무대에서 공연을 올리다 보면 ‘슈폰탄(spontan, 즉흥적인)’한 상황을 무수히 맞닥뜨리게 된다”며, “하지만 그런 돌발적인 상황과 즉흥적인 대처가 오히려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곤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교감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특권이고, 휴머니즘을 학습한 로봇이 등장한다 해도 결국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AI를 통해 발전된 기술 중 무엇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는 과도기를 걷고 있는 지금, 기술의 악용과 불필요한 혼란을 막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