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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는 예술가를 위한 ESG 경영의 일환으로, 사옥* 내 미디어 월(COMO)을 통해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있죠. 6월에는 특별한 작가님이 SKT 미디어 아트전을 찾았습니다. 일흔 살이 넘어 한글을 배우고, 여든 줄에 두 권의 시집을 내놓은 황보출(89세) 작가님입니다.
곡절의 삶을 버텨온 황보출 작가님은 “지나고 보니 즐거운 일이 더 많았다” 말합니다. 이제는 온화한 마음으로 삶을 바라볼 줄 아는 작가님은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탄생한 시구(詩句)들은 우리를 아프게도, 웃음짓게도 만듭니다.
한 편의 시로 마음을 위로하는 시인, 황보출 작가님을 만나 그녀의 삶과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 서울 을지로 T타워 및 대전 둔산사옥.
힘듦을 견디면 봄이 온다
황보출 작가님의 첫 번째 시집, <「가」 자 뒷다리>는 작가님의 삶을 소재로 한 시집입니다. 작품 속에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밭일하며 8남매를 키워야 했던 애잔한 삶이 담겼습니다. 피난민 시절을 그린 <배고픈 슬픔>, 시집살이 시절의 <빨래>, 쬐는 불에 양말 타는 줄도 모르고 장사했던 <새벽에 시장에 가면> 등 작품 한 편, 한 편에 아린 추억이 가득합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떠올려도 눈물 짓게 하는 그런 기억들입니다. 작가님은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저가 어릴 적부터 가난해가 남의 집 살이를 했어요. 집으로 돌아와 가족하고 살면서도 장사 하면서 가족들 챙겼지요. 열 세 살부터 떡 장사며, 생선 장사며 안 해본 것이 없어요. 젊을 때는 보릿고개도 겪고, 일제 시대도 겪고, 6.25도 겪고 그래다 보니 많이 힘들었지예.
동지섣달 폭풍 냇가에
고등얼음에 콩깍지 잿물 받아서 빨래하면
손발이 터져 나갈 듯했네.
물을 팔팔 끓여
요강에 담아 가 손을 적셔가며 빨래를 했네
밤에 손이 터서
피가 나고 따갑고
견디기 힘들게 아플 때
시어머님 하신 말씀.
“야야 오줌을 눠서 거기에 손을 담그라.”
내 오줌을 눠서 아픈 내 손 담갔네.
▲ 빨래, 시집 <「가」 자 뒷다리> 중
시집갈 땐 나이가 열아홉이었지요. 논 9마지기, 밭 1,200평 큰 농사를 짓는 집으로 시집을 갔어예. 그래 일해가 8남매를 키웠지요. 젊을 땐 자식들 교육 시킨다고 돈 욕심만 냈어요. 돈에 눈이 멀어가 어미 노릇을 못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후회가 돼요. 시어머님, 남편한테도 오히려 미안해요.
남편님 물신은 목장갑입니다.
발에 무좀이 심해서
장갑으로 물신을 만들어 신고
떨어지면 버려서
논둑마다 장갑 물신이 가득합니다.
십 년이 지나도 우리 논둑에는
남편님 신던 목장갑이 있습니다.
▲ 남편님 물신은, 시집 <「가」 자 뒷다리> 중
남편은 예순 두 살에 백혈병을 앓았어요. 그때 전라도 어딘가에 대나무 죽순 고아낸 약이 그리 좋다 하데요. 그래가 아침에 약 지으러 나갔다 저녁에 왔지요.
저가 저녁에 들어오니 아픈 남편이 얼매나 화가 나요. 그런데 약이 아직 도착을 안 한 거라. 그때 내가 약이 아닌 것을 약이라카고 주어 버렸어. 그게 제일 미안하고 죄송해요.
시어머니는 아들 떠나기 3일 전에 먼저 가버렸지요. 저가 나이를 먹어 보니까네 시어머님이 얼매나 힘들었으면, 아들 앞질러 떠났을까 그런 생각이 나요. 그때 많이 괴로웠지요. 죄 지은 마음에 하늘을 못 보고 땅만 보고 살았어. 요즘은 매일 새벽마다 참회 기도를 해요. 남편한테, 시어머니한테, 친정 부모한테 기도를 합니더. 그런 지가 십 년이 넘었어요.
가장 힘들었던 일이예? 이제 다 치워 불고 하나도 없지요. 살다가 보니까네 그때 힘든 거는 없어져 불고 생각이 밝아지더라고예. 여든아홉 살에 내 발로 걷고, 내 손으로 밥 먹고, 일하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행복한 할머니가 되어 그저 감사합니더.
또 살아 보니까네 ‘힘든 일이 있어야 봄도 온다’ 생각이 들어요. 힘든 일이 없으면 봄이 안 와요. 요즘 젊은 선생님들 다 힘들잖아예. 그래도 물러서지 말고 용기 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가 있어요.
글과 시는 어두운 마음을 밝혀준 존재
“세월 지나고 보니 좋은 날이 많다.” 황보출 작가님에게 이런 깨달음은 준 것은 글이며 시일 것입니다. 글을 배우고 과거를 돌아보고 시로 옮기며, 비로소 작가는 그럼에도 삶은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테죠.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정화하는 도구. 작가님에게 글과 시는 늘 그런 존재였습니다.
모진일 다 견디고 나니까네 일흔이 넘어버렸지요. 자식들이 불러 서울에서 지내다 ‘푸른어머니학교’에 가서 글을 배웠지요. 선생님들한테 시도 배웠어요. 선생님들이 일기를 써오라 해가 일기를 썼는데 그게 시가 되었지예.
내가 처음 한글 배울 때
‘가’ 자 뒷다리도 모른 나
선생님들 덕분에
한글날 세종대왕릉에 가서
글짓기 대회
내 평생 첫 으뜸상을 받았네
가슴이 우쭐했네.
▲ ‘가’ 자 뒷다리, 시집 <「가」 자 뒷다리> 중
일기는 살아온 이야기를 주로 썼지요. 일기를 쓰고 시를 쓰다 보니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더라고예. 사람은 힘든 게 있어야 풀리는 것도 있고 카거든요. 또 법정스님, 법률스님 글을 많이 읽고 보니 마음이 밝아지더라고예. 저가 그 봄을 89세에 알았습니더.
(중략)
내가 갈 때 모든 짐 다 놓고
새처럼 훌훌 뒤돌아 볼 것 없이
내가 지은 죄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저 허공에 구름같이 사라지고
한강 맑은 물에 깨끗이 씻고
밝은 마음으로 가려 하네.
▲ 시집 <시인 할머니의 욕심 없는 삶> 중
<시인 할머니의 욕심 없는 삶> 원문 감상하기 [ Click ]
처음 일기 쓸 때는 살아온 이야기를 적으면서 응어리를 풀었지요. 이제는 힘든 건 없어지고, 생각이 밝아졌습니더.
<시인 할머니의 욕심 없는 삶>은 법정스님 책을 읽고 썼지요. 스님은 다 비웠잖아요. 저는 스님 글을 볼 때마다 마음이 풀립니더. 스님처럼 하나씩 버려야 하는데, 아직 욕심을 가지고 있어예. 지금도 버리려고 많이 노력합니더. 다 안고 있으면 힘들잖아요.
(중략)
마음 조금 우울할 때
자연만 보면 아무 생각도 없다.
모든 생명은 말이 없다.
(중략)
나무 한그루 춥고 하니
추운 겨울 잠자고 깨어나
새 싹이 나오고 귀엽다.
갈 때도 자연으로 갈 텐데
▲ 시집 <시인 할머니의 거짓 않는 자연> 중
<시인 할머니의 거짓 않는 자연> 원문 감상하기 [ Click ]
욕심 버리고 살다 보니 자연이 눈에 들어오데요. 텃밭에 나가서 자연을 보면 색이 나오는 게 참 예쁩니더. 자연은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힘든 게 없어요. 사느라 못 봤던 자연이 이제야 보여요.
자연을 보면서 느끼는 것도 많지요. 개천에 가서 운동을 하면 시멘트 바닥에 조그맣게 올라온 자연이 보여요. 힘들게 커도 저렇게 단단하게 자라네 싶지요. 아주 힘들게 자란 꽃은 안 쓰러지더라고예. 그러면서 생각하지예.
아! 내도 자연과 같았네. 힘들게 살아서 자연매로 강하네.
젊은 선생님들에게 용기 전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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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모두 잊고, 자연을 보며 글을 쓴다는 황보출 작가님. 그렇게 쓴 한 줄, 한 줄에 어느 누군가는 마음의 위안을 얻고 어느 누군가는 용기를 얻는 모습이 작가님은 고맙기만 합니다. 아울러 작가님은 이번 전시회를 찾은 많은 사람이 용기를 얻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 못난 할머니 글 보러 온다니, 오시는 분들한테 정말 감사하고 용기를 주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공부하느라 고생하고, 훌륭하게 자란 분들이 사회 나와서 얼매나 힘들게 살고 있습니까. 그래도 물러서지 말고 좌절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예.
오늘 학교에서 시를 쓰라고 하는데
내 머리가 어지럽다.
느낌을 쓰라는데
느낌이 무엇인고?
모른다.
머리를 굴려도 잘 못한다.
한글학교 올해 7년을 다녔지만
못한다.
그래도 용기를 내봤다.
▲ 용기, 시집 <「가」 자 뒷다리> 중
또, 앞으로만 달리면 너무 흔들리니까네 뒤로 조금 물러서기도 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더 앞으로 나갈 수도 있고 그렇지요. 저 하늘도 맑은 날이 있고, 모진 날이 있고 그렇잖아요. 훌륭하신 젊은 선생님들도 저매로 용기를 내고 살았으면 합니더.
마지막으로 하나 더 얘기하고 싶어예. 집에서 꼬불꼬불 적은 글인데 여기 와서 보니 내 필체가 이리 예뻤나 싶데요. 89살 먹은 할매를 위해서 이렇게 예쁘게 만들어준 선생님들한테 정말로 감사합니더. 보니까네, 여기가 진짜 봄입니더.
▲ 황보출 작가님이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일상
두 번째 시집을 낸 작가님은 현재 포항으로 내려가 새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합니다. 그저 일기 쓰듯 하루 한 줄씩 성실하게 써 내려갈 뿐. 늘 그렇듯 황보출 작가님이 적은 글에는 삶에 대한 통찰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것이고 또 몇 년의 세월 뒤에는 하나의 시로 완성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하듯 한 편, 한 편의 시는 우리의 마음을 따스하게 데워줄 것이 분명합니다. 90세를 넘어 작가님이 바라본 삶과 자연은 어떤 모습일까요?
또 다른 작품을 기대하며, 6월의 SKT 미디어 아트전을 감상해 보기 바랍니다. 황보출 작가님의 전시는 6월 30일까지 진행됩니다. SKT 을지로 T타워 및 대전 둔산사옥에 방문하시면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